잉여로운 일상/삼켜진 일기

칙촉, 바나나우유 그리고 누나

Temporary backups 2021. 3. 2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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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명절에 친척집 놀러갔다가
서울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긴 참사다.
내가 이제서야 숨겨왔던 뒷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내리고나서 저 여자가
정말 죄송하다고 재차 사과하며 혹시 괜찮다면
자기 동생이랑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내가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힘들다니까
다음에 사준다고 번호 물어보길래 넘겨줬고,
결국 며칠 뒤 그 여자의 동생은 빼고 둘이 만났다.
저녁 먹으면서 와인 한 잔 하고, 아쉬우니 한 잔 더 하자길래
지금보다 더 생각없던 나는 “우왕 넹” 하고 한 잔 더 했을테고...
또 한 잔 하고... 그리고...

정신을 잃었던건지 다음 날 깨어났는데
내 침대가 아니었고 우리집도 아니었고 부모님 집도 아니었다.
내가 깨어난 방엔 나 혼자였고 일단 모텔이 아닌건 확실했지만
순간 어제 같이 술마시던 여자의 집일거란 결론을 내렸다.
이 정신나간 세상에 내가 더 정신이 나가서
‘그 여자랑 같이 잔건가? 아님 잡아먹힌건가? 아... 망했다...
바나나우유로 나를 강타한 애랑 내가 원나잇을 했다고...?’
이런 생각들을 하며 좌절하던 중에
내가 옷을 그대로 입고있음을 깨달았고, 그 순간부터
이곳이 어디냐의 문제는 잊고 일단 서로 잘 모르는 남녀간에
부끄러운 일은 없던듯하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었는데
거실엔 그 여자가 아니라 왠 아줌마와 아저씨가 있었다.
아줌마가 나한테 일어났냐고 물으시는데
순간 ‘그 여자 집이 아니었어? 이사람들 누구고 대체 여긴 어디지’
하는 생각에 당황해서 “네” 라는 대답만 하고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채로 가만히 얼어서 있었다.
잠시뒤 밥 줄테니 먹으라는 아줌마의 말에 나는 “네...” 하고
물음표 백만개인 채로 얼떨결에 식탁 앞에 앉게 되었고
아줌마가 밥먹자고 다른 방에서 자기 딸을 부르고 나서야
이분들이 그 여자의 부모님일거란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이었음을
깨닫고,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술마시던 여자가
부모님 같이사는 집에 술취한 나를 데려오고, 그리고
그 부모님들은 자기 딸의 남자친구도 아닌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차마 그 어떤것도 물어볼 수 없었기에 일단 다같이 밥을 먹고
심지어 밥먹고 욕실 써도 된다길래 씻기까지 했다 ㅋㅋㅋㅋ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일단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서는데 아저씨가 그 여자한테 나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하셨고, 그 여자는 나랑 같이 집을 나왔다.
같이 나와서 길을 걷는데 민망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 여자는 자기가 커피 마시고싶으니 자기랑 카페부터 가자며
나를 끌고갔고, 카페에서 지난 밤의 일들을 듣게 되었다.

내가 12시 되기도 전에 더이상 못마시겠다고 했는데
그 여자가 그냥 조금 더 놀자고 했고 그래서 더 남았다고 한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에 내가 취해서 졸기 시작했고,
자기가 나보다 누나니까 일단 나를 택시에 태워서
누나 집으로 데려갔단다.
누나가 부모님한테 남자친구 취해서 데려왔는데 재워도 되냐고
물었는데(정신나감? ㅋㅋ) 부모님이 그러라고 했단다.
오... 참으로 대단한 누나와 부모님이 아닐 수 없다.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다가 그 누나가 나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고, “너 이따 저녁때 누나랑 또 놀아줘야돼” 라는
명령조의 마지막 말에 나는 알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뭐 이쯤 되면 저녁에 누나를 보게되면 자기랑 만나자고
할 것임을 알았고, 나도 누나가 재밌고 괜찮은 사람같았지만
저때는 내가 직장이고 뭐고 “빠염”을 외치고
출국해서 런던잉여가 되기까지 열흘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영국에 적어도 1년, 길면 3년정도 머무를 생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어떤 관계의 진전은 어렵다고 판단했고
저녁에 누나를 만나서 얘기하다가
이달 중순에 영국간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누나는 종종 연락할테니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얼마 뒤 출국을 했다.
영국 있는 동안 가끔 누나에게 연락이 왔었고,
중간에 내가 영국여자랑 연애를 하게됐을땐
“야 서양여자 만나니까 좋냐? 판타지 충족돼?”
하고 장난도 치면서 그냥 오래된 친구처럼 지냈던 것 같다.

한국 돌아올 시점에는 내가 솔로였다.
누나도 그걸 알았기에 내가 서울 돌아온 뒤로
몇 번 만나서 술을 마시다가 결국 연애하자고 말이 나왔는데,
누나가 이쁘고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당시 나는 연애란 것을 하기가 굉장히 망설여졌던것 같다.
글자수 제한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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